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명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들이다. 일본은 물론 남한에서도 소설, 게임, 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북한은 3명의 흥망을 나름대로 파악,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명 중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출처: 신장의 야망 전국입지전

오다 노부나가 오케하자마 전투, 혼노지의 변 소개

북한 사전은 오다 노부나가를 일본 전국시대 말기 무장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오하리(아이치현)의 대봉건 영주의 아들로 1560년 교토에 올라가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이마가와를 격파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했으며 혼인정책으로 강적을 억제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2000여명의 병력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2만명의 병력을 격퇴한 오케하자마 전투를 지칭한 것이다. 이 전투로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에 이름을 알렸으며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게 됐다.

북한 사전은 오다 노부나가가 1568년 장군 아시카가 요시데루의 동생 요시아키를 받들고 교토에 들어가 무로마치 막부를 재건했지만 노부나가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되는데 위협을 느낀 요시아키는 다른 대봉건 세력과 결탁해 그를 견제했다고 설명했다. 또 1571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파에 속해 강한 승병을 소유한 히에이산의 절을 불태워 버렸으며 1573년 요시아키를 추방하고 막부를 종국적으로 멸망시켰다고 전했다. 그후 오다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아사이, 다케다 등 적대 세력을 격파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다른 영주들과 손잡고 오다 노부나가를 압박했던 신장포위망 사건을 설명한 것이다.

사전은 오다 노부나가가 1574년 종3위 참의, 1577년 우대신이 됐고 그가 자기에게 대항하는 봉건세력들을 소탕하는 동시에 각지의 농민봉기를 가혹하게 진압했다고 설명했다. 이세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군을 공격해 2만명을 학살했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오다 노부나가가 주코쿠 기방에 대한 평정을 진행하던 중 자기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습격을 받아 교토 본능사(혼노비)에서 자살했다고 설명했다. 혼노지의 변 사건을 설명한 것이다. 북한 사전은 오다 노부나가가 잔인하다고 언급했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서 소개했다.

출처: 신장의 야망 전국입지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의 원흉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북한 사전은 비난하고 있다. 사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6세기말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이며 우리말로 풍신수길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층민이라는 인식과 달리 북한 사전은 그가 봉건관리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살경 오다 노부나가에게 복무해 점차 세력을 넓혔으며 노부나가가 암살되자 그를 죽인 아케치와 반대파 세력을 격파하고 자기의 근거지로 오사카성을 쌓았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가 1585년 일본왕으로부터 내대신, 다음은 관백으로 임명되면서 도요토미라는 성을 가졌으며 이듬해 최고관직인 태정대신이 됐다고 전했다. 또 1587년 규슈를 평정하고 1590년 전국을 통일했다고 덧붙였다.

사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에 대한 실제 통치자로 토지조사, 무기몰수, 현물에 의한 조세수탈, 신분제도의 제정 등 인민수탈과 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날뛰었다고 비판했다. 또 그가 봉건영주, 상인들의 영토와 재부에 대한 요구, 자신의 권세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1587년 12월 조선 정부에 사신을 파견할 것을 강요했으며 1591년 조선정부에 일본이 장차 중국 명나라로 쳐들어가겠으니 조선을 길을 빌려달라는 오만무례한 편지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그가 1591년 나고야(규슈)에 조선침략전쟁을 지휘할 총본영을 꾸리고 병력동원과 전함건조에 나뛰었으며 이듬해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통솔하에 20여만의 침략군을 조선에 내몰았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 침략군은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침입해 살인, 약탈, 방화 등 만행을 감행했다고 비판했다.

사전은 조선인민들의 완강한 항전에 얻어맞은 일본군이 경상남도 남해안의 일부 병력만 두고 쫓겨났으며 히데요시가 1597년 다시 조선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으나 참패당했고 일본군의 총퇴각을 며칠 앞두고 병으로 죽었다고 소개했다.

사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일본 내 통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출처: 신장의 야망 전국입지전
출처: 신장의 야망 전국입지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세키하가라 전투 언급

사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했다. 사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에도 막부의 초대 장군이라고 설명했다. 사전은 그가 어려서 오다 노부히데, 다음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인질로 있다가 요시모토가 죽은 후 이마가와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진출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연합해 적대세력을 격파하고 세력 범위를 확대했다고 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린 시절 이마가와의 인질로 생활하고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협력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사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82년 노부나가와 함께 다케다 가쓰요리(다케다 신겐의 아들)를 멸망시키고 스루가 지방을 병합했으며 그후 가이, 시나노 지방을 평정했다고 설명했다. 또 노부나가가 죽은 후 히데요시와 싸워 이겼으나 그와 화해하고 그의 밑에서 유력 대봉건 세력으로 있었다고 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0년 히데요시와 함께 호조씨를 격멸해 간토8주를 본봉받았으며 에도성으로 근거지를 옮겼다고 설명했다.

북한 사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함께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을 도발했다고 주장했다. 남한에서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비협조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반해 북한은 공범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6년 내대신, 대로의 높은 직위에 올랐으며 1598년 히데요시가 죽은 후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고 전했다. 이후 후시미성에 근거해 실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사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하가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반대파 세력을 격파하고 전국의 패권자가 됐으며 1603년 정이대장군으로 돼 에도에 막부를 창설했다고 설명했다.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 과정을 소개한 것이다.

사전은 그가 1605년 정이대장군직을 자기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줬으나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틀어쥐고 있었다며 1614년, 1615년 도요토미의 잔여 세력을 청산하고 이어 다이묘들이 지켜야할 법규 무가제법도를 제정 공포하는 한편 공가제법도를 제정해 일본 왕과 왕족의 일상생활에 대해 감시, 통제했다고 전했다. 이를 통해 250년 간 일본을 통치한 에도 막부의 제반 기초가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 사전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내용을 결합하게 되면 일본 전국시대 역사가 된다. 즉 북한도 일본 전국시대의 변화와 흥망에 대해 연구, 분석하고 이를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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